대구KYC, 원폭피해 어르신들 영정사진 촬영

할머니, 할아버지 “김~치, 찰칵”

6일 대구 중구 약령시 골목. 40여명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들이라도 나온 것처럼 서로 인사하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대구KYC(참여와 나눔의 공동체)에서 영정사진 촬영이 있던 이날, 대구∙경북지역 원폭피해 어르신들이 이 세상 소풍의 마지막을 준비하기 위해 모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웃으세요”라는 사진사의 말에 카메라 앞에 앉은 할머니는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옆에서 구경하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재미있다’며 소년, 소녀 같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영정사진을 찍으러 온 그들에게 이날은 슬픈 날이 아니라 같은 아픔을 지닌 친구를 만나는 날일 뿐이다.

먼저 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던 권효윤(69) 할아버지는 1945년 원폭 당시 히로시마에 살고 있었다. 그때 나이 7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1943년. 당시 20대 초반이던 젊은 아버지가 조역(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감)을 갔다 다치는 바람에 간호를 위해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일본행 배에 올랐다.

1943년 8월6일 아침, 히로시마의 한 병원에서 치료 중이던 아버지를 대신해 권씨와 어머니, 여동생은 보초(당시 조역을 간 사람들은 돌아가며 보초를 섰다고 함)를 서고 있었다. 섬광이 번쩍임과 동시에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딸아이의 눈과 귀를 막았고 딸과 함께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권씨도 한참을 날아가 벽에 얼굴을 부딪쳤다. 불행 중 다행으로 숨진 가족은 없었다. 광복 후 귀국길에 올랐다. 권씨는 오른쪽 청력을 잃었고 얼굴 반쪽이 마비됐다.

“동네 아이들에게서 놀림도 많이 받았다”는 그는 “군대 신체검사에서 한쪽귀가 안 들린다고 이야기 했다가 고막이 있는데 거짓말한다며 뺨을 맞고 군대에 끌려가기도 했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권씨는 이날 자신의 여동생 권군자(66)씨와 함께 영정사진을 찍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2천600여명의 원폭피해자가 생존해 있고 그 중 대구∙경북지역에는 570여명이 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정부의 도움을 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되지 않는다.일본의 경우 지난 2003년부터 치료비 영수증을 주면 치료비 만큼의 돈을 환급해 주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겨우 지난해부터 보건복지부에서 한달에 10만원 가량 치료비로 줄 뿐이다. 이마저도 일본의 검증을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우리나라 자체에는 원폭피해와 관련된 법이 아예 없다는 것.

원폭 피해자 인증도 쉬운 일이 아니다. 히로시마의 경우 평화공원을 중심으로 반경 3km이내에 거주한 자에 한해 건강관리수첩을 지급하고 있으며 처음에는 보증인 없이 신청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보증인 3명이 필요하다.

원폭피해자협회 대구∙경북지부장인 김기학(67)씨 처럼 자녀가 같은 증세로 고통을 받아도 아무런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도 문제다. 일본도 2세에 대해서는 어떤 규정도 마련돼 있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김씨는 “큰 아들도 나 처럼 경련을 일으키는가 하면 온몸의 통증을 호소하고 있다”며 “병원에 가도 정확한 병명이 나오지 않아 답답할 뿐”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으로 영정사진을 찍으러 들어간 김씨는 “영정사진 찍는다고 바로 죽는 것도 아닌데 뭐.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그안에 좋은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며 담담하게 카메라 앞에 앉았다.

최일영기자 mc102@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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