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설마 별일 있겠나’ 무덤덤

안보불감증인지-잦은 과장에 익숙해졌는지

북한은 지난 9일에는 핵실험으로, 지난 94년 6월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탈퇴로 한반도를 긴장시켰다. 두 번 모두 ‘핵’이란 공통분모로 놀라게 만들었지만 이에 따른 시민들의 모습은 변했다. ‘핵실험’이라는 ‘행동’을 보였지만 ‘말’만 있었던 ‘국제원자력기구 탈퇴’때 있었던 ‘사재기’는 사라졌다. 주가는 32.60포인트 하락해 지난 94년에 비해 13.08포인트 더 떨어졌지만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이 시기를 투자의 호기로 보고 예금을 인출, 주식을 사고 있다. 팔려고 했던 금을 사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이번 핵실험이 미국을 조준하고 있고, 오랜 햇볕정책으로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한 점과 시민의식 성숙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는 긍정적인 견해와 ‘안보 무관심’이 무지로 이어져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에서 오는 착오적 반응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 혼란은 없었다

핵실험이 있었던 9일 오후 7시 대구 수성구 만촌동 이마트. 평상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라면코너와 부탄가스, 쌀 등을 판매하는 코너도 여느 평일의 모습과 차이가 없었다.

쌀을 사러온 김모(66)씨는 “북한의 ‘남한 불바다’, ‘국제원자력기구 탈퇴’등의 사건이 있을 때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신용카드로 라면이나 촛불 등을 샀었다”며 “그러나 이번에는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C마트와 또 다른 C할인매장도 라면 등의 판매량이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홈플러스는 북핵 문제로 사재기 고객들이 늘 것으로 예상, 9일 특별판매코너(매대)를 마련하고 사재기 주요물품으로 인식되는 라면과 즉석식품 등을 따로 진열해 판매에 나서고 있지만, 매출은 변함이 없다. 이마트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홈플러스 정광윤 대리는 “94년도에는 일부 사재기현상이 나타났었지만, 이번에는 차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추석 연휴 다음날이라 매출이 2~3% 감소했으며, 매장 내 손님들도 줄었다”고 말했다.

오히려 이 시기를 투자의 호기로 보고 집중투자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직장인 최모(31)씨는 북한의 핵실험 이후 적금을 제외한 은행예금과 비상금 등 700만원을 9일 장 마감 전에 몽당 투자, ‘D’사의 주식 1천842만주를 구입했다. 불과 열흘 전 3천940원하던 주식을 3천400원에 산 것은 물론 10일 주당 180원이 올라 하루만에 33만원 이상을 벌었다. 최씨는 “주변 사람 중에는 대출을 받아 주식을 사는 경우도 있다”며 “이런 투자 호기는 지난 9.11테러 이후 처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 12년 전에는 달랐다

북한의 국제원자력기구 탈퇴 선언이 있었던 94년 6월. 발표 다음날부터 신문지면을 장식한 것은 ‘사재기’였다.

열풍이 휘몰아친 것은 주로 생필품, 그 중에서도 라면이었다. 농심의 경우 평소보다 30%가 많은 39만 박스(하루)가 팔렸다. 발표 이후인 14일부터 3일간 라면 3사(농심, 삼양라면, 오뚜기)에서 판매된 라면 개수는 5천400만개. 국민 모두가 하나씩 먹고도 남을 양이었다. 부탄가스와 참치, 분유 등의 판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백화점들은 ‘비상용품코너’를 신설, 방독면 등을 팔았지만 주문이 몰려 이틀 만에 판매를 중지했다.

라면 판매업자들은 “유통기한이 끝나기 전에 구입한 라면을 더 먹지 못할 만큼 많이 사간다”라며 ‘사재기’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말해줬다. 돈이 휴지조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은행에서 현금을 인출하는 사례도 잇따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당시 이영덕 국무총리가 성명을 통해 “필요한 생필품과 비축된 쌀의 양이 충분한 만큼 사재기 자제해 달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 엇갈리는 시각

이러한 변화를 바라보는 시각은 엇갈렸다.

‘위기상황인 것은 인식했지만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와 시민의식 성숙으로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이라는 측과 ‘안보관이 박약해 져 현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르는 것’이라는 측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원폭피해자 구술(口述)증언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대구KYC(청년연합) 김동렬 사무처장은 “북한의 의도가 무엇인지 시민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라며 “문민정부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햇볕, 포용정책 등 일련 대북관계를 통해 ‘북한=주적’으로 생각하는 시민들이 줄어들었고 핵무기가 남측이 아니라 미국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이제까지 북한이 취해온 행태들에 따른 학습효과로 극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도 한 몫 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현 상황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10여 년 전보다 더한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국방연구원 김태우 박사는 “94년 IAEA 탈퇴선언과는 급이 다르다. 그때는 ‘핵무기를 만들겠다’는 의미였지만 이번 핵실험은 ‘언제 사용하느냐’의 문제”라며 “현실을 제대로 인식한 뒤에 사재기 등의 동요가 없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위기의식부재로 인한 것이라면 차후 더 심각한 형태의 동요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박사는 또 “전 세계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 혼란스러워 하는데 정작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위협적인 상태인 우리나라만 지나치게 조용하다”고 말했다.

노인호기자 inh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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