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의사에겐 아직 폭탄 하나가 남았습니다

상하이에서 만난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

윤희웅(uhnjuri) 기자



▲ 루쉰공원(옛 홍커우 공원) 안에 있는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 ‘매정(梅亭)’. 임정청사와 함께 한국 관광객들이 빠뜨리지 않고 찾는 곳이다.

ⓒ2005 오마이뉴스 김시연

한국인이라면 상하이에서 이곳만큼은 가봐야

지난 9월 29일 베이징에서 기차를 타고 쾌속으로 12시간을 달리니 상하이입니다. 베이징의 심한 황사와 육중하고 위압감 주는 건물들 대신 맑고 파란 하늘과 다양하고 독창적인 빌딩들이 반겨줍니다. 상하이로 건축기행을 떠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말을 이해할 듯합니다.

‘자본주의의 심화가 창의성을 높이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만 놀라운 것은 그것이 규제에 의한 것이라는 겁니다. 상하이시정부에서 유사 형태의 건물 건축을 금지하는 규제를 시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규제로 창의성을 발현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상하이의 화려한 고층건물들

ⓒ2005 오마이뉴스 김시연

화려함을 경험하는 것을 상하이 관광의 첫 번째로 꼽습니다. 가이드도 홍콩의 야경은 이제 상하이 푸둥지역 아래 있다고 하며 상하이의 화려함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한민족이라면 상하이를 방문하는 이유가 그것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이제 찾아갈 상해임시정부청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인 홍커우 공원에서 나라의 회복을 위해 일생을 던졌던 그분들을 기리고 오늘의 조국과 그 속의 자신을 되돌아보기 위함이 더 큰 이유일 것입니다.

‘어서들 오게나 친구들이여’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상해임시정부청사를 찾아갑니다. 가장 보존이 잘 된 곳입니다. 그러나 정부청사라는 이름을 달고 있기에는 출입구도 좁고, 정원이랄 것도 없으며, 2층 오르는 계단은 두 사람 나란히 걷기조차 힘듭니다.



▲ 상해임시정부청사 출입구

ⓒ2005 오마이뉴스 김시연

사람들 오가는 것도 불편한 좁은 곳이지만 독립운동가들은 언젠가는 커다란 대문 활짝 열어젖히고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마음 놓고 들어와 활보하며 편히 쉴 수 있는 해방조국의 정부청사를 그려가며 망명 정부의 한을 달랬을 것입니다.



▲ 상해임정청사 내 김구 선생 집무실

ⓒ2005 윤희웅

백범 선생의 어머니가 밤늦게 채소장수가 버린 배춧잎을 주워 소금물에 절여 김치를 만들어 내놨을 정도로 배고프게 지냈지만, ‘찾아오는 이라고는 경찰과 세금 독촉하러 오는 사람뿐’이었지만, 언젠가는 굶주리지 않고, 한 상에 둘러앉아 배불리 먹을 수 있고, 왁자지껄 웃어젖힐 수 있는, 시장통처럼 시끌벅적한 해방 조국의 정부청사를 꿈꾸며 참아냈을 겁니다.

한국관광객들로 길게 늘어선 줄은 허름한 임정청사가 아직도 업무를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청사는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내부에는 당시의 업무실, 부엌 등이 정비되어 있습니다. 집무실에 앉아 있는 김구 선생이 안경을 벗으며 ‘어서들 오게나, 친구들이여’하며 맞이하는 것만 같습니다.

많이 아시다시피 현재 알려진 상하이의 임정청사는 옮겨 다닌 임정청사 중 7년이라는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문 곳입니다. 하지만 해방이 되고 나서는 상하이가 아닌 충칭에서 임정요인들이 고국으로 들어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런 의문은 상하이 홍커우공원(현 루쉰공원)이 풀어줍니다. 날을 바꾸어 30일 오전에 윤봉길 의사를 만나러 갑니다.

1932년 4월 29일 11시 40분.

윤 의사는 일왕의 생일과 전승축하 기념식이 열린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수통형 폭탄을 단상에 투척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상해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이 즉사하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주중일본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습니다.

당시 중국 국민당의 실권자인 장제스가 ‘백만대군이 할 수 없는 일을 조선 청년 일인이 해냈다’고 감탄한 것은 익히 알려진 것입니다. 공원 근처에 살던 루쉰도 이 의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 윤봉길 의사 흉상

ⓒ2005 오마이뉴스 김시연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는 쓸 수가 없습니다’

거사 당일 아침, 김구 선생과 윤의사와의 대화를 백범일지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 윤 의사가 의거 직전 김구 선생에게 건넨 시계

ⓒ2005 오마이뉴스 김시연

“윤군은 자신의 시계를 꺼내어 주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저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는 쓸 수가 없으니까요’ 하기로 나도 기념으로 윤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윤군에게 주었다.

식장을 향하여 떠나는 길에 윤군은 자동차에 앉아서 그가 가졌던 돈을 꺼내어 내게 줬다. ‘왜 돈은 좀 가지면 어떻소?’ 하고 묻는 내 말에 윤군이 ‘자동차 값 주고도 5, 6원은 남아요’ 할 즈음에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이 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하였더니 윤군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향하여 머리를 숙였다. 자동차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커우 공원을 향하여 달렸다.”

홍커우공원 의거는 노선갈등으로 내외적으로 혼란이 있던 임정의 위상을 제고시켜 주는 계기가 됩니다. 한인애국단을 이끌던 김구의 위상도 함께 높아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주지역의 만보산 사건으로 인해 중국인들과 조선인들간의 극도의 감정대립도 이 사건으로 해소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훌륭한 활동 근거지인 상하이에서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비밀연락을 받지 못한 안창호가 윤의사의 의거 직후 일경과 프랑스경찰에 붙잡혔고, 임정은 장장 5800km에 달하는 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상하이를 떠나 자싱(嘉興), 항저우(杭州), 전장(鎭江),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구이양(貴陽), 치장(綦江) 등 긴 여정을 거쳐 1940년 충칭에 도착합니다. 외교활동에 유리한 상하이를 떠나며, 7년간 정들었던 상하이 청사를 떠나면서도 마음이 한 편으로 뿌듯했을 임정 요인들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거사 당일 윤 의사는 사실 폭탄 2개를 준비했습니다. 두 폭탄 중 미처 던지지 못한 나머지 하나의 폭탄을 이제 마저 던져 지지부진한 친일의 잔재를 정리하는 것이 꽃다운 나이 나라를 위해 목숨 던진 의사에게 최소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 기념관 내 목판에 쓴 윤 의사 어록

ⓒ2005 윤희웅

주인 잃은 시계는 남아 의사의 목소리를 전합니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당시 의사의 나이는 불과 스물다섯.

스물다섯 살 의로운 죽음 앞에 서른두 살 젊은이는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