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끝 : 한국의 히로시마

– 한국의 원폭피해자의 전후보상운동

안드레아스 히핀

심진태씨의 첫번째 딸은 어머니의 품안에서 젖을 먹으면서 죽었다.

“죽기 전까지 딸애는 점점 야위어 갔습니다”. 62세의 늙은 농부는 말했다. 그가 살고 있는 합천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해괴한 병들로 사람들이 죽어가자 심진태씨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1945년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 그는 겨우 2살이었다.

심진태씨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피폭을 당한 한국인의 70%가 합천 출신입니다” 라고 했다. 생존자들의 대부분은 다시 합천으로 돌아왔고 심진태씨 역시 현재 합천에 남아있는 원폭피해자 598명중 하나이다.

합천은 부산의 북쪽에 있는 경상남도에 있지만 다른 지역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벼를 심어놓은 논 사이로 침엽수와 활엽수가 서있는 이 가난한 산악지역은 공상가들을 위한 낙원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새긴 8만여 개의 아름다운 목판을 자랑하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해인사역시 이 산악지역에 숨겨져 있다.

하지만 그리 멀지않은 과거의 슬픈 비밀 또한 이곳에 숨겨져 있다.

합천은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리기도 한다.

평화시민연대 대표 강제숙씨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피해자 70만명 중 한국인은 10%에 달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일본에 강제로 징용되어 군수 공장에서 탄약이나 총을 만드는 일을 해야 했었고, 다른 이들은 대부분의 합천출신이 그러하듯이 땅이 없는 농부들이었고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왔습니다”고 말했다. 그녀가 속해있는 평화시민연대는 강제로 징용된 노동자들에 대한 배상을 촉구하는 운동을 주로 하고 있다.

강씨는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당한 사람들 중에 일본인이 아닌 희생자도 있다는 사실은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일본은 자신이 유일한 피폭국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들과 다른 아시아인들 역시 피폭을 당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1945년에서 1950년 사이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본정부나 한국정부는 이들을 무시했고, 다른 한국인들조차도 이들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고 성공회대 한국 현대사 한홍구 교수는 말했다.

“몇몇은 친일파라고 비난받기도 했습니다. 일본에 살았다는 것만으로도요”

심진태씨처럼 나이가 어린 한국인들은 한국말이 서툴러 따돌림을 당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생존자 50,000명중에서 한반도로 돌아온 이는 43,000명에 달했다.

“일본사람들이 일본에 남기를 원하는 한국인들을 죽일거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고 김일조 할머니는 말했다. 그녀는 교토에서 태어났지만 히로시마로 이주를 당했다. 정신대로 차출이 될 때 즈음에 다른 도시로 이주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결혼을 서둘렀다. 원자폭탄이 떨어지는 그 때, 그녀는 18살이었다.

“합천에서의 삶은 너무 힘들었습니다”고 그녀는 회상한다. “우리에게는 땅도 없었고 농사를 짓는 법도 몰랐다. 하지만 내 시어머니가 합천으로 돌아오고 싶어해서 돌아왔습니다.”

김씨는 1946년 6월에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밀입국 하려다 붙잡혀 추방되었다.

흉터가 그대로 드러났던 원폭피해자들은 한센병 환자처럼 보이는 바람에 격리를 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대부분의 원폭피해자들은 길바닥으로 내몰렸다.

“흉터가 햇빛을 받으면 반짝거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쉽게 이들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고 심진태씨는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던 피해자들은 자신이 피폭자라는 사실을 숨겼다. “만약 원폭피해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결혼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라면서 심씨는 “저 역시 숨기고 있었습니다”고 덧붙였다.

“정부도 이들을 돕지 않았는데 왜 사람들이 자신이 원폭피해자라고 말을 하겠습니까? 공개적으로 밝힐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고 한홍구 교수가 말했다.

한교수는 원폭피해자들이 왜 자신의 피폭사실을 숨겨야 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일본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투하 이후에 항복을 했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은 핵폭탄이 한국을 해방시켰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에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 공격을 고려하고 있었다. 또한 1957년과 1991년 사이에 한국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있었다. 600개에서 1,200여 개의 미국의 핵무기가 한국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들이 피해자들로 하여금 더더욱 침묵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고 한교수는 덧붙였다.

한국원폭피해자 협회 협회장인 곽귀훈씨는 “한국으로 돌아온 원폭피해자들의 90%가 아무런 병원치료나 지원을 받지 못해 죽었습니다”고 주장했다.

원폭피해자들과 그들의 자손들은 한국에서 여전히 평범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교수는 “일본처럼 사설 탐정을 고용해 결혼할 상대자의 뒷조사를 하는 건 아니지만, 원폭의 유전성에 대해서는 매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고 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김일조 할머니는 1993년까지 원폭피해자 등록을 망설여왔다. 당시 그녀의 아들과 세명의 딸들이 결혼을 다 하였기 때문에 등록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그녀는 합천 원폭피해자 복지회관에서 다른 78명의 원폭피해자들과 함께 살고 있다. 이곳에서 원폭피해자들과의 구술증언 프로그램에 봉사하고 있는 젋은이들은 김씨에게 “할머니”라고 부른다.

복지회관은 일본에서 받은 재원으로 세워졌다. 1993년에 일본은 한국에 인도주의적 원조의 명목으로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을 돕는데 40억엔을 주었다.

이 40억엔은 적십자가 넘겨 받아 복지회관을 건립하고 유지하며 매달 피해자들에게 10만원씩의 보조금을 주는데 쓰여졌다. 하지만 이 기금이 작년으로 바닥이 났고 지금은 한국정부가 복지회관을 지원하고 있다. 다량의 재활치료장비들은 일본의 KAKKIN (핵금회의)와 같은 NGO로부터 기증을 받고있다.

하지만 아직도 일본은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받고 있는 한국인 원폭피해자에 대한 전후보상을 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우리는 ‘인도주의적 지원’이 아닌 전후보상을 원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72세를 맞은 김재만씨는 이렇게 덧붙였다. “일본정부는 우리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고이즈미의 서울방문을 보면서 저는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씨는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 그는 초등학생이었다.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은 수 십년 동안 일본의 전후 보상과 치료를 요구하는 투쟁을 해왔다.

1978년의 일본 고등법원이 판결은 획기적이었다. 일본 사가현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밀항한 한국인 원폭피해자 손진두씨가 재외피폭자의 지위에 상관없이 일본 피폭자와 동등한 대우를 요구했고, 고등법원은 손진두씨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손진두 재판의 승소는 상처뿐인 승리였다. 일본 후생성이 재외 피폭자에 대한 치료와 보조금 지급을 일본 거주자에 한정시켜 버린 것이다. 1998년 곽귀훈은 후생성의 방침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일본정부가 그에 대한 치료를 한국에서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지원하기를 요구했던 것이다.

“우리가 원한 것은 일본인 원폭피해자와 동등한 대우였습니다. 나는 일본에 있건 한국에 있건 간에 원폭피해자입니다. 나는 어디에 있던지 간에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고 주장했던 그는 결국 4년 뒤에 일본 고등법원에서 승소하였다.

“강제징용자나 군위안부, 그리고 전쟁피해자에 관련된 일본정부에 대한 소송은 80여건에 이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소송들은 실패했습니다”

“결국 저의 소송만이 승리를 거두었고 일본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재외피폭자에 관한 제한 법령이 무효화 되지 않았고 또한 그 법령을 고수했던 사람들에 대한 재판도 아니었습니다. 법원은 단지 그 행정상의 통달이 효력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만 결정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재판의 승소로 재외 피폭자들도 2003년 3월 1일부터 피폭자 건강수첩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현재까지 수첩을 받은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이 약 3,000여명에 이른다.

하지만 곽귀훈씨는 이 법령이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에게 여전히 커다란 장벽임을 강조했다. 수첩을 받기 위해서 원폭 피해자들은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 자신의 피폭사실을 증명해줄 수 있는 당시 현장에 있었던 증인 2명과 함께 가야 하기 때문이다.

김일조씨는 일본어에 능통해서 종종 통역을 하기 위해 다른 원폭피해자들과 함께 일본으로 가곤 한다.

“일제시대의 제 이름이 마쯔모토 키미요였고, 그 덕분에 저는 히로시마 덴데츠(Dentetsu)회사에서 운영하는 버스 안내원으로 3년 동안 일할 수 있었습니다.” 김일조씨는 “그들은 절 일본사람처럼 대해줬습니다”라고 회상했다.

곽귀훈씨는 여전히 600여명에 이르는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이 치료와 보조금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은 죽어도 차별을 받는다. 일본인 원폭피해자들은 198,000엔의 장례비용을 받을 수 있지만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은 일본정부로부터 이조차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정치적 의제로 이슈화한 것은 곽귀훈씨가 아니다. 60년이 지난 올 봄에 원폭피해자의 자손들이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지원하는 특별법을 제기하면서 여론을 환기시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까지는 진보적인 의료인들만이 원폭피해자들을 위한 활동들을 해왔다”고 한홍구 교수는 말을 이었다.

50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한국 원폭2세 환우회의 전 회장이었던 고 김형률씨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일년 전까지만해도 역사학자였던 저 조차도 수많은 한국인들이 원폭으로 죽어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고 한교수는 말했다. “김형율씨로부터 한국인 원폭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핵무기의 공포와 위험성을 방관하고 있는 것이 한국의 교육 현실입니다. 그 어떠한 역사교과서에도 히로시마에서, 그리고 나가사키에서 5만여명의 한국인들이 단 하루만에 죽었다는 사실은 나와있지 않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한국에 원폭2세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당시 피폭자들이 네다섯명의 자식을 낳았다고 가정한다면 현재 8만에서 12만명에 이르는 원폭2세들이 한국에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뿐만이 아니라 원폭 2세의 문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문제이다. 곽귀훈씨는 현재 일본에 50만명의 원폭 2세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을 지원하는 특별법이 제안된 것은 올해 한국에서가 처음이다.

한국인 원폭피해자 문제의 공론화는 KYC(한국청년연합회)와 같은 시민단체들의 운동에 동력이 되었다.

대구 KYC 김동렬 사무처장은 “강제 징용자들이나 소위 군위안부들의 문제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문제는 우리 역사에서 철저하게 소외되고 방치되어왔다”고 언급했다. “우리가 원폭피해자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역사는 우리가 지켜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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