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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단골집’이던 ‘곡주사 할매집’서 20년만에 모임

어느새 주름에 머리 희끗…막걸리·운동가요 “여전하네”

“40년전/대구 남산동 출신의 노동자 전태일이/ 어두운 서울의 청계천 재래 평화시장에서/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서/내 몰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중략)/그해 유월 그 날의 열정과 함성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그 날의 뜨겁고 순결하던 열망은/ 벌써 싸늘한 재처럼 식어버렸나?/차디찬 절망의 얼음덩이가 되었나?…(중략)/오늘, 우리는 이제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를/친구여 다시 한 번 고민하자.”

지난 5일 밤, 대구시 중구 덕산동 동아쇼핑 뒷골목 주점 ‘곡주사 할매집’에서 열린 ‘반갑다 친구야-6월항쟁 세대의 회상’ 행사장, 김용락 시인이 6월항쟁 20주년 기념시 <친구여 대답을 준비하라>를 절규하듯 낭송했다.

염매시장 뒷골목에 자리잡은 곡주사 할매집은 70∼80년대 운동권의 추억이 서린 모임장소였다. 한 대학생 손님이 지었다는 ‘곡주사(哭酒士)’란 상호는 ‘(유신을)통곡하고 저주하는 선비들의 모임’이란 뜻이다. 시골주막처럼 낡고 빛바랜 이곳에서 이제 어느덧 중년이 되버린 50여 명의 사내들이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20여년 전 그 날을 추억하려고 다시 모였다. 일흔 고개를 훌쩍 넘겨버린 곡주사 주인할매 정옥순(74)씨는 몸이 불편해 딸 이경선(54)씨가 가게를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사진있음>대구시 중구 덕산동 ‘곡주사 할매집’에서 임구호 대구경북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새로 한 명씩 반가운 얼굴들이 들어올 때마다 유쾌한 악수와 막걸리 잔이 오가는 가운데 항쟁 당시의 신문기사로 장식된 주점 안은 계명대 노래패 ‘함성’이 부르는 운동가요로 가득찼다. 흡사 20년전 그 날로 돌아간 듯 했다. 떠들석한 분위기는 인혁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던 임구호 대구경북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진지하게 바뀌었다.

임 이사장은 “6월항쟁은 아직도 계속되는 우리들의 약속”이라며 “우리가 서 있는 토대가 어디인지를 깨달아 우리 사회가 반민족, 반민주, 반인권 사회로 후퇴하지 않도록 노력해달라”고 말했다.

6월항쟁 당시 경북대 사회부장을 맡아 대열을 이끌었던 이태영(42)씨는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혼자 개인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과거의 말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중년이 된 20년 전의 대학생들은 그 때 어깨를 걸고 불렀던 노래를 함께 불렀다.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만세, 만세, 민주주의여 만세.” 노랫소리 속에 밤은 끝을 모르고 깊어갔다.

글·사진 박영률 기자 ylp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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