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합천 평화기행을 다녀와서

오월, 평화로운 상상
/ 천안 KYC 이명재

난생 처음 대구, 합천이라는 곳을 가 봤다. 대구는 꽤 큰 도시지만 여지껏 갈 기회가 주어지질 않았고 해인사로 유명한 합천도 한번쯤 가볼 기회가 있었겠지만 이번이 처음 방문이다. 어떤 기운이 나를 그곳으로 보냈던 걸까? 생각해보면 우연인 것도 같고 피하려고 해도 마주쳐지는 숙명같기도 하다.

일년전 즈음인가 한국에도 원폭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랬던 기억이 난다. 원폭피해자가 한국이라는 땅에 생존해 있다는 사실에 놀랬다기 보다는 당연히 한국에도 원폭피해자가 있을텐데 그에 대한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는 나의 뻔뻔할 정도의 무심함에 놀랐었다. 지금 이순간까지도 한국사회에서 논외의 대상이 되고 있는 그 분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언제 한 번 시간 나면 합천에 방문해 보자’라는 안일하고 무책임한 계획을 잡고 있었다.

그러던 중 대구KYC의 사무처장님께 연락을 받고 처음엔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대구로 향했다. 생전 처음 가보는 도시, 처음 타 보는 KTX! 조금은 설레는 기분으로 여행기분도 내 보았다. 개인 사정으로 하루 먼저 도착하게 되어 대구KYC 식구들의 통일길라잡이 사업을 본의 아니게 견학하게 되었다. 마침 종전 후에도 계속된 한반도의 전쟁 발발 위기의 순간에 관한 영상물을 보게 되었는데 전쟁을 겪지 못했던 세대로서 전쟁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더불어 전쟁위협에 대한 불감증을 갖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보았다.

지금 한반도의 상황과 전쟁, 북핵문제와 통일, 세계를 쥐락펴락 하고자 하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주의의 못된 행태 등등… 여러가지 생각들이 씨줄과 날줄로 엉키면서 좀 복잡했다. (이내 즐거운 술자리에서 시시덕거렸지만..~)

다음날 합천으로 떠났다. 그때까지 난 정확한 나의 일정을 알지 못했었는데 서울에서 KYC, 평화네트워크,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가 [반핵평화기행]을 위해 합천에 오게 되었는데 목포에서 원폭사진전을 준비하시는 분과 내가 중간에 동행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화기행]이라… 왠지 두 단어의 조합이 어색하다고 느껴졌다. [평화]라는 단어는 너무 편안한 느낌의 뭉게구름같은 이미지이지만, 막상 나에게 대입해 놓으면 다른 세상이야기만 같고 낯간지런 단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평화] 그것도 [기행]이라니… 같이 동행하는 사람들은 또 어떨까? 사뭇 궁금하기도 했다.

조금은 서먹하고 뻘쭘한 상태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합천 보건소에 위치한 [한국원폭피해자 협회 합천지부]였다. 그곳에서 처음 심진태 지부장님을 만났는데 그까지만해도 지부장님께서 그렇게 명강의를 해주시리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합천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회의숙소에서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되었다.

먼저 김영수 할아버님의 원폭에 관한 경험을 들었다. 차분한 논조로 원폭이 히로시마에 떨어졌을 때의 상황과 그 후에 한국으로 다시 오기까지의 과정, 그 후의 삶 등을 말씀해 주셨다. 함께간 관심 있는 친구들의 여러 질문에도 너무 말씀을 잘 해주셔서 저간의 사정을 조금은 더 알게 되었다. 일본에서 큰 일을 당하고도 한국에 오기도 힘드셨고 한국에 오고 나서도 힘들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 다음 순서로 심진태 지부장님의 강연이 있었다. 지부장님께선 개인의 이야기와 시대적 상황을 적절히 섞어 재밌는 이야기도 곁들이시며 전체적인 맥을 짚어주셨다.

그 당시 원폭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들도 있지만 굶주림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히로시마에 가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사람들은 거기서도 못 살았기 때문에 시내중심이 아닌 변두리에 살아 비교적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고 하셨다. 살아남았지만, 살아남은 자의 고통은 시작되었다. 그들은 우여곡절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원폭피해자를 처음엔 반갑게 맞이했으나 나중엔 밥그릇 빼았는 [우환동포]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고 종전후에도 계속되는 흉년으로 끼니를 잇기조차 힘든 상황이 계속되고 이때의 가난이 아직까지도 대물림되는 실정으로 변변한 교육도 받지 못하게 된다.

또한 원폭피해자 사이에서도 원폭피해의 사실을 숨기려고만 했다. 예전엔 지금보다도 장애에 대한 차별도 심했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려면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2세 3세에 대해 유전적으로 확실하고 체계적인 데이터는 없지만, 늘 유전에 대한 불암함을 떠안고 산다.

한국내의 원폭피해자들이 처한 현실이 이렇다 보니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피해에 대한 데이터도 적고 목소리를 내기도 힘든 상황이다. 글로 적기엔 좀더 복잡하고 더욱 어려운 실정이다.

현재 원폭피해자라는 사실이 증명이 되면 일본에서 피폭자수첩이라는 것을 발행해주고 일정액의 보상도 해준다. 하지만 어르신들의 서류 작성도 힘든 실정이고 아예 포기하시는 분들도 많다고 들었다.

사실, 보상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토록 끔찍했던 원폭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일, 전쟁없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 중요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피폭자가 두번째로 많은 나라라고 한다. 비록 60년이 지나도 아픈 상처 아물지 않은 슬픈 과거를 간직한 나라의 국민이지만, 그렇기에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고 되풀이 하지 않게 하고자 하는 목소리를 높힐 수 있는 중심에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늦기전에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뵙고 보다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힘쓰고 보다 많은 양의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여 정리하는 일이 중요하다.

지부장님의 말씀 후 가슴 한 구석에 잔잔한 울림이 있었다. 시대와 세대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확신에 찬 당당한 모습으로 해주신 말씀에서 운동가의 모습도 아버지의 모습도 투영되었다.

그후엔 대구KYC 김동렬처장님의 그동안의 평화, 통일 사업에 관한 간략한 브리핑이 있었다.

다음날 합천원폭피해자복지관에 들러 김광혜 복지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복지관 시설 견학후 할아버지 할머니와 대화시간을 가졌다. 처음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망설였는데 너무 잘 해주셔서 즐겁게 대화 할 수 있었다. 어르신들과 한데 어우려져 간단한 레크레이션도 했는데 대부분 밝은 표정들이어서 기분이 한층 좋아졌다.

조금은 낯간지럽던 [평화]라는 단어가 나에게도 들어와 주었다. [평화]를 만드는 것은 슈퍼맨도 마징가제트도 태권브이도 아닌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아직도 너무 거대하게 느껴지고 무엇을 해야할런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만들어질 [평화]로운 날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